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지음

안녕하세요. 요새 저는

밀리의서재로 신나게 심리학 책들을 읽어보고 있는데요.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이 책 정말 술술 읽히더라고요.

이 책에 위로 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 보니, 저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나봐요.

그 사실에 다시 한번 위로받고요...

저도 이 책 한번 추천드려볼게요.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에 제 생각을 기록해서 다음에 저도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자존감 = 성취 수준 ÷ 야망



자존감에 대한 정의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수식처럼 정리하니까 아? 싶더라고요. 성취수준에 비해 야망이 낮을수록 만족감은 더 커지는거고, 사람마다 다 다른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테니 저 사람은 자존감이 높구나? 하면서 굳이 비교한다해도 나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의미 없는 거 였죠..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날은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고(아마 당신은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를 만났겠지요), 어떤 날은 기분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경험을 하면서 그저 버티며, 수습하며, 꾸준히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도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어요. 누구나 기복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고요. 누군가와 비교하는게 의미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항상 좋을때의 타인을 두고 이기지못할 싸움을 하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건 자신의 성취를 얕잡아보고 스스로를 하대하기 때문에, 남에게도 들이밀지 않을 엄하고 모진 잣대로 자기평가 self-rating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은 남에게 할 수 없는 인성 파탄난 멘트들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멘트 날릴 수 있겠냐고요!!

좀 더 자신에게 관대해질것.



우리는 겸손을 표해도 될 만큼의 대단한 뭔가를 정말로 해내고 나서야 그때 비로소 겸손해지면 됩니다. 사소한 성취에 대한 사소한 칭찬은 그냥 받아들입시다.



칭찬은 좀 민망스럽고 쑥쓰럽게 생각했는데, 상대방도 가볍게 하는 칭찬이니 나 역시도 가볍게 대꾸해주자는 결심이 섰어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가벼운 칭찬일지라도 한번 더 내어주고요.



말려들지 마세요. 그보다는 나의 자존감을 낮추는 가족과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 양육자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수용을 받지 못한 경험이 당신에게 낮은 자존감을 가져다주었다고 판단했다면, 이제는 성숙한 수준의 재양육 reparenting을 제공해줄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을 만나 성숙한 내면을 구축할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양육를 제공할 사람이 타인이기도 하지만, 나이기도 하니까! 

이제 어른인데 어른스러워지자!



자기 삶에 충분히 집중하는 ‘척’하기

• 중립적인 이야기에도 과잉 방어하고 정색하는 패턴을 부디 억제하고, (설사 마음이 불편해졌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 불편한 상황에서 유머로 적절하게 받아치는 ‘척’하기

• 혼자 밥을 먹거나 홀로 있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척’하기

• 실패나 성공의 가능성이라든지 주위의 평판에 초연한 ‘척’하기

•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일일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드러내지 않기



우리 모두 이런 척을 하며 살고 있었던 거라고 받아들이니까 타인과의 비교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었고 나만 이상한게 아니라는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런게 사회화의 일종이겠죠?




당신의 낮은 자존감과 관련한 모습들은 당신과 당신의 심리치료자만 알면 족합니다.



나 혼자 정해둔 '진짜 나'의 모습에 강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되었고요..



타인의 결점이나 실수에 발끈하며 불같이 화를 낸다든지, 실제로 그렇게까지 큰일이 아닌데도 타인을 험하게 비난합니다. 자기의 자존감이나 존재 이유에 위협이 감지되면 주위 사람들이 당황할 정도로 선제적인 공격을 시도합니다.


‘발끈’의 동의어는 ‘낮은 자존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니 내가 발끈하게 되는 순간, 타인이 발끈하게 되는 순간도 그저 흘려보낼 수 있겠더라고요.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으니까요... 

그 시간을 편집적으로 곱씹지 말고 흘려보내자..



그러나 자존감이나 자기가치에 대해 큰 의심이 없는 사람은 나의 진심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내 모든 진심이 굳이 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나 또한 모든 사람의 진심을 일일이 알아주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없다.. 이렇게 가볍게 흘려보내는 마음가짐에 보탬이 되고 있어요.




인간관계에서의 기억은 서로 다르게 적힙니다

애인과 언쟁할 때 가장 소모적인 행동은 “네가 그랬잖아!” “네 표정이 그랬잖아!” “네가 비꼬는 투로 말했잖아!”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최대한 빨리 누구든 ‘서로의 기억은 늘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뒤, 맥을 끊어야 합니다.



정말 남편이랑 싸울때를 떠올려보면 기억이 서로 다르게 적힌다는 말이 딱이죠. 정말 지나고보면 소모적인 언쟁..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누군가 당신을 싫어한다 해도 대체로 뭐 아주 큰일이 일어나진 않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 험담을 하고 있으면 어쩌지?’ (자리에 없으면 나랏님도 욕을 듣는 법인데 우리라고 안 들을까요? 별일 아닙니다.)

대체로 큰 일이 일어나지 않죠. 근데 괜히 편집적으로 그 상황만 곱씹고 있으면 그 시간동안 생산적인 다른 일을 할 힘을 잃어요..

배반당한 경험, 가족 내의 정서적 학대, 또래 사이의 집단 따돌림 같은 외상적 경험은 이런 버튼을 수없이 잘도 만들어냅니다. 나의 외모, 성격, 행동, 능력, 심지어 나의 존재와 관련해 무시당하거나 거부되고 비난받던 시절에 경험한 수치심과 죄책감, 고립감의 그림자는 너무나 깊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더는 제가 가진 취약점이나 수치심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폐하려 애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기 시작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경계해야 합니다


저자는 스스로의 취약점이나 수치심을 보호하는데 시간을 쏟는게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신것 같아요. 타인에게 오픈한다는 건 큰 용기인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어려워요. 내가 스스로를 포장하는 순간을 인식하는 연습부터 해보려고 해요...



귤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늘 100퍼센트로 좋아하거나 100퍼센트로 싫어해야만 답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귤에 대한 개인의 선호는 변동성이 있는 동시에 대략적인 경향성도 띱니다.


호오 好惡와 신뢰는 ‘정도의 문제’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럭저럭 좋아하는지, 그 사람은 나를 그럭저럭 좋아하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저 ‘충분히 믿을 만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분개의 버튼이 눌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최대한 빨리 상대와의 관계와 역사를 돌아봐야 합니다.


정도의 문제, 변동성과 경향성...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되는 거겠죠..? 저는 항상 흑/백을 나누고 확실하지 못한것에 대해 공격해왔는데, 다시 한번 흘려보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 순간의 말 실수인지, 나를 원래 싫어하는 데 튀어나온 공격인지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는거같죠?..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삶에 큰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돈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어떻게’에만 집중하세요.

어떻게 일할지, 어떻게 놀지, 어떻게 사랑할지.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도 괜찮습니다.

뭐 어때요. 하루가 재미있으면 좋고, 아니면 또 마는 겁니다. 돈도 좀 써보고요.


그거 생각나요. 김연아한테 인터뷰어가 운동할때 무슨 생각을 하냐니까.. 뭔 생각을 하냐고 그냥하는거라고.... 

김연아도 그냥 한다는데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삶에 큰 의미를 두냐고요! 위인전 낼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면 족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지내보자~!


일이나 사랑의 실패라든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기질적 특성 때문에 우울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 ‘어, 왔어?’ 하는 수용과 승인은, 나를 우울의 피해자가 아닌 우울을 맞아들이는 주체적인 집주인 모드로 준비시킵니다.

네, 당신에게도 우울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울을 맞아들이면서 당신은 다음 두 가지를 함께 궁리해야 합니다.

• 우울의 원인을 탐색하기

• 나의 기분을 좋게 할 것을 찾기

우울을 살피는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울을 다루는 기술이 됩니다.

정말 우울을 살피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니까요. 꼭 한번 해보셨으면...

집주인 모드라니, 약간 다음 기복이 기대가 될 정도의 멘트에요!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수치심, 열등감, 적대감, 때로는 살의까지도 느끼겠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치밀 때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내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존재인지 변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일종의 스팸 문자 같은 것입니다.


그냥 한번 쓱 훑어보고 차단 버튼을 누른 후 당신의 일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도 없는 사람임을 인식할 때, 바로 그때 나를 괴롭히던 감정들이 고요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스팸문자에 우리 화나지 않잖아요. 의미 없는 사람한테 의미를 주지말자고요.


인간은 원래 복잡합니다.

우울하면서 행복할 수 있고, 실패하면서 배울 수 있고, 관계를 지속하면서 독립할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을 흑백논리로 몰아붙여 단 두 가지 결과 중에 하나로만 규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가치를 주입식으로 폄하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이나 환경들과 우아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당신이 품위를 잃을 필요가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흑백논리적 사고를 통합적 사고로. 

요새 느끼는 건데, 복잡한 인간이라서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구나. 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마음의 에너지가 그곳에 남습니다. 시험을 한참 보던 도중 갑자기 시험지가 회수되어 미완성 과제로 남는 경우 시험문제를 유독 잘 기억하게 된다는 ‘자이가르닉 효과 Zeigarnik effect’ 연구로도 입증된 바 있지요.


우리는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불쾌감으로 자꾸 이전에 실패했던 일로 회귀합니다.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같은 싸움을 되풀이하며 상처받습니다.


언젠가 돌아보면 바뀔 리 만무했음이 명확해지지만, 착각은 여러 곳에서 시작되어 나를 계속 애쓰게 만들었습니다.

미완성 과제니까 그럴수도 있다고 하네요. 자꾸만 그 자리로 돌아가는 자신을 탓하지 말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길.


전통적인 심리치료나 항우울제는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는 데 유용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없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건 아니니 이 부분은 스스로 조금 맡아줘야 합니다.


우울을 살피는 작업을 함께 하기. 항우울제는 내가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아주는 거라서요. 저는 요새 심리학 책 읽고 스스로의 마음 들여다보는게 긍정적인 감정을 올려주고 있어요!



저와 함께 허지원 님의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읽어보시니 어떠셨어요?


이 책은 집에 한권 쯤 구비해두면 좋을 책인 것 같아요. 문체도 따뜻하고요.

제 마음에 남는 구절들로 적어보았는데요. 읽어보면 다들 마음에 남는 구절이 다를 것 같아요.

읽어보시면서 나의 마음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타인과 지혜를 나누는 경험은 언제나 도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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